병인박해 / 병인양요

프랑스와 조선의 치열한 다툼

핵심 키워드

사전적 정의💡

병인박해 : 고종 3년(1866년)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탄압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 8천여 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사건
병인양요 : 병인박해에 항의하러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와 조선이 싸운 전쟁

쉬운 설명🐣

POINT 1📌

‘제국주의’라는 말을 들어봤나요? 유럽은 신항로 개척(발달한 항해술로 아시아 대륙과의 무역에 성공함) 이후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앞다투어 아시아 대륙으로 진출합니다.
한편, 조선 시대에 프랑스 신부의 천주교 포교 활동도 활발해져, 천주교 신자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제사 의례를 거부하는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죠?

POINT 2📌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 시기를 지나, 1852년부터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국왕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위쪽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1866년 조선에 온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와 조선의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는 병인박해를 일으킵니다.

POINT 3📌

이에 프랑스는 병인박해를 구실로 삼아 강화도에 침략하게 됩니다. 문수산성에서는 한성근 부대가, 삼랑성(정족산성)에서는 양헌수 부대가 각각 활약하면서 조선군은 프랑스군을 물리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병인년(1866년)에 양이(洋夷-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질서를 파괴)라는 의미로 ‘병인양요’라고 합니다.

POINT 4📌

하지만, 이 전쟁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당시 강화도에는 조선의 문서(의궤-왕실 행사를 기록한 책)가 보관된 외규장각이 있었는데, 그곳의 도서를 프랑스군이 약탈해 갑니다.
이후 145년 만인 2011년에 임대(빌려줌) 형식으로 반환되었고, 소유권은 여전히 프랑스에 있습니다.
병인양요는 조선이 처음으로 겪은 서양과의 전투였어요! 이후 조선은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많은 변화를 겪어야만 했어요.
또한 병인양요는 외규장각 의궤와 현재까지 연결되어서 의미가 큰 사건입니다.

이번 기회에 용어를 완벽히 이해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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